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교회로 가던 중에, 4명의 소년들이 거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늦은 시간에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그 선생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몇 마디 말을 걸고, 다음 주일에 자신의 교회에서 만나자고 간곡히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일이 되자 정말 그들 모두가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날 이후로 이 선생님이 가르치는 반에서 아주 핵심이 되는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치셨고, 소년들은 철저한 신앙 훈련을 받은 후에 나중에 장성해서 마을을 떠났습니다. 미국 아이오와 주의 작은 마을, 웨스트 브로치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위대한 선생님들
그 뒤 거의 30년 이상이 지난 1932년, 이제 나이 들어 은퇴하시는 그 무명의 선생님 생일 파티에서 네 통의 편지가 낭독되었습니다. 바로 그 4명의 옛 제자들로부터 온 편지들이었습니다. 한 소년은 감사하게도 중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소년 하나도 미국 연방 은행의 총재가 되었으니 정말 기쁜 일이었습니다. 또 한 소년은 후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리고 마지막 소년은 놀랍게도 바로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였습니다.
그 편지들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그때 저희들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전에 길거리를 배회하던 네 소년들이 한 좋은 교사와의 만남 이후에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는 큰 인물들로 성장해 있었던 것입니다.
후버는 사업에도 재능을 보여 광산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민구제위원회를 만들어 활동할 정도로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박애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고용을 늘리고 경제 활성을 위하여, 네바다 주와 애리조나 주 경계에 초대형 다목적 댐을 만들게 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사막에 쓸데없이 그런 것을 왜 만드느냐며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이후 그 댐으로 인해 사막이 옥토로 변했습니다. 후임자였던 루즈벨트 대통령 때에 이 댐이 완공되었는데, 전임자의 공로를 인정하여 댐의 이름을 '후버댐'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재임 중에 일어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하여,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은 있습니다. 취임 6개월 만에 다가온 대공황은 후버가 초래한 것도 아니었고, 당시 미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온 것이므로, 대통령 선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버 대통령이 해결책을 시도할 때마다 야당이 제동을 걸어 효과적인 대처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대공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도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이 아니고, 많은 물자 수요를 촉발시킨 2차 세계 대전 덕분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고 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을 몇 분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존 워너메이커는 변변한 학력도 없이 크게 성공한 미국 백화점의 창시자이며 유명한 갑부입니다. 나중에는 탁월한 판단력, 아이디어,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체신부장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YMCA 건물을 지어 주었고, 무엇보다 어린이를 사랑하여 이들을 섬기고 가르치는 일을 일생의 가장 큰 사업으로 알았던 훌륭한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세계주일학교연합회 총재로 선출된 후, 세계주일학교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 말씀이 저의 일생에 기본적인 교육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는 세상적인 공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일학교에서 평생 성경을 공부했고, 그 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또한 성경으로 제 인생의 확고한 삶의 원칙과 기초를 세웠고, 성경의 바탕 위에 저의 인격과 사업을 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받았던 이 주일학교 교육이 너무나 귀했기에 이 사역을 위하여 제 인생 전부를 투자했습니다."
워너메이커가 체신부장관으로 추천받았을 때 주일학교 교사 일에 지장이 된다면서 거절했다가, 반드시 주일은 쉬게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장관으로 취임했다고 합니다. 또한 매주 기차를 타며 워싱턴에서 교회까지 오가면서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는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장관직은 몇 년만 하면 끝나는 부업이고, 주일학교 교사는 제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양성봉 장로님은 부산 초량교회 주일학교 교장을 거쳐 1930년에 장로 장립을 받았으며, 부산시장, 경남도지사,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분입니다. 자유당 정권 때 농림부장관이 된 양성봉 장로님은 그때까지도 이 교회 주일학교 교사직을 계속 수행했는데, 토요일 밤이면 서울에서 밤차를 타고 부산까지 와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다시 밤차로 상경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양 장로님의 어려움을 알고 주일학교 교사직은 사임하고 장관직에만 전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양 장로님은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여 장관직 사임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사임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관직을 수행하다 보니 우리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관직을 그만두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기상천외한 사임 이유를 듣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 사람아! 남들은 장관 한번 해 먹겠다고 돈을 보따리로 싸 들고 설치는데, 자네는 기껏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나 한 가지 부탁 좀 해야겠어. 나도 교인인데 이왕 떠나는 마당에 당신은 장로니까, 나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나 좀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무디 선생 역시 뛰어난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교사로 지원했을 때, 그 교회의 주일학교 학생 전체가 16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교사는 12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에게 거리에 나가서 학생들을 전도해 반을 만들라고 요청했습니다. 무디는 다음 주일에 거리의 장난꾸러기 18명을 데려다가 다른 교사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또다시 밖으로 나가 학생들을 계속해서 모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아예 시카고의 빈민가에 사는 거친 소년들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일학교 사역에 전적으로 집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미시간 호숫가에 있는 한 통나무 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다음엔 거리 모퉁이에 있는 한 낡은 창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주일학교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불과 수 년 만에 1,5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한 교사의 열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또한 미국에서 가장 성실한 주일학교 교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거의 평생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습니다. 그가 대통령 선거일 하루 전, 모든 선거 유세 계획을 취소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주일학교를 찾아서 교사직을 수행했다는 뉴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수백만 표가 오가는 투표 전날, 최고의 황금 유세 연설을 포기하고 학생들 앞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카터의 모든 참모들은 다 된 선거를 망쳤다고 책상을 치고 울분을 토했으며, 미국의 주요 언론들도 일제히 카터의 불리함을 조심스럽게 관측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보기에 작은 일에 충성하였던 그를 크게 들어서,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라는 큰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도봉교회 김진호 감독께서는 자신의 옛 주일학교 선생님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배고픈 어린 시절, 교회에 가면 떡 준다는 소식을 듣고 떡 선물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갔다가, 뜻밖에 주일학교에서 최귀윤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큰 형님 같은 이분은 나를 친동생같이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당시 엄격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사랑은, 할아버지의 무서운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게 했다. 그것이 나의 신앙생활의 시작이었고, 이때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 때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서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나 할 정도로 나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에 끌려 정말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또한 박하라는 분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한 주일학교 선생님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조태진 선생님은 성경 얘기를 해 주셨다. 얘기를 얼마나 재미나게 해 주시는지 매 주일 기다려졌다. 선생님이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들은 언제나 '아 재미있겠다 선생님의 말씀, 아 어쩌면 그렇게도 잘하시나 고맙습니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살렸다. 선생님의 얘기가 끝난 후에는 '이 말씀 잘 듣고 잊지 않았다가, 이 다음에 우리도 좋은 사람 되겠어요, 고맙습니다'로 답례했다. 원대한 꿈을 갖게 해 준 무궁무진 재미난 이야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께 바친 이삭, 야곱의 팥죽과 장자의 권리, 이스라엘을 구한 모세,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천지 창조, 아담과 하와, 돌아온 탕자, 삼손과 데릴라, 다윗과 골리앗, 나라를 구한 에스더…. 너무 많아서 다 소개할 수 없다."
이분들 중에는 나중에 유명하게 알려지신 분들도 더러 있지만, 당시에는 거의 무명의 주일학교 교사였던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자랑스러운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다 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의 값진 수고가 없었다면, 오늘날 같은 교회의 성장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운동은 18세기 영국에서 언론인이었던 로버트 레이크스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산업 혁명의 혼란기 속에서 천대받던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어린이들을 모아서 1780년 주일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아이들에게 옷과 신발을 나눠 주고 세수하기, 머리 빗기, 사이좋게 지내기, 시간 지키기, 어른에게 순종하기 등을 가르쳤다고 합니다.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크게 호응하고 후원했습니다. 감리교의 스승 웨슬리도 이 운동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이렇게 처음 3년간의 운동에서 어린이들의 큰 변화에 확신을 얻은 레이크스는 1783년 자신의 신문에 그동안의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습니다.다음 해에는 점차로 다른 언론사도 이 운동에 대해 잇달아 게재하면서 전국에서 큰 반향이 일어났습니다.그리고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 대장을 중심으로 1785년엔 주일학교협회가 초교파적으로 결성됐습니다.그 결과로 1785년 25만 명이던 주일학교 학생 숫자가 1851년엔 20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습니다.
주일학교가 희망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그만큼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지적 호기심이 매우 큰 나이이기 때문에 성경을 가르치면 마치 마른땅이 단비를 빨아들이는 듯 잘 흡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배운 지식과 감화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이들의 평생에 영향을 줍니다.
이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고백하는 바와 같습니다. 잊혀진 것 같았던 어떤 성경 구절이 예전에 열심히 가르쳐 주셨던 주일학교 선생님의 고마운 모습과 함께 떠오를 경우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또한 어른들에 비하여 아이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훨씬 성공률이 높고 효과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선교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제일 먼저 아이들이 몰려옵니다. 필리핀에서 선교하시는 양한갑 선교사님의 이야기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차량 소통이 원활해 딸라에는 오전 7시 40분에 도착을 했습니다. 어린이 주일 예배는 8시에 시작합니다. 일찍이라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희는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쓰러질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준석 형제는 뒷걸음을 치며 달려와 차에서 막 내린 저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목사님, 목사님, 교회 안에, 교회 안에…', 그를 따라 들어가 보니 벌써 20여 명의 어린이들이 와서 반듯한 자세로 앉아 찬송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음악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던 프레드릭 형제는 피아노를 치고, 돈돈 형제는 기타를 치면서 일찍 온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도, 한국 청년들도 그들에게 주일학교를 도와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스스로 일찍 나아와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주일 예배를 준비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는 모두 너무 큰 감동을 받고 정말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번 주 주일학교 어린이 출석은 9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말씀으로 양육받고 꾸준히 성장하면, 앞으로 필리핀에도 건강한 개혁 교회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대구열방교회에서는 장년 성도라면 누구나 다 주일학교 교사라고 합니다.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교회 내 모든 평신도들을 교사화하여 다음 세대를 살리는 동역자로 세우고, 그 결과 30명이었던 주일학교가 400명이 출석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1차적으로 주일학교의 부흥이 이뤄지면 자연스레 중고등부를 시작으로 청년부까지 자연적 성장이 연결되어 이루어집니다. 또한 불신 가정의 아이들을 통해 부모를 전도함으로써 장년층이 성장합니다.
주일학교 성장이 청소년과 청년층은 물론 장기적으로 장년층 성장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필자 자신도 주일학교 어린이가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여 수년 뒤에는 자신의 부모님을 전도하고 함께 나란히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육관에 감동이 있다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교회는 미래가 없는 교회입니다. 주일 아침에도 호수처럼 잔잔한 교회는 생동력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필자는 주일 아침 교회에 들어설 때 교회 입구까지 흘러나오는 아이들의 왁자지껄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너무나 듣기에 좋습니다. 그 소란한 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고, 찬양으로 들리고, 드디어는 제 삶에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혹시 자신의 삶이 나른하고 기쁨과 감동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지금 당장 교회 교육관으로 가 보세요. 가셔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보십시오. 그리고 자라나는 한 영혼의 소중함을 느껴 보십시오.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전도를 가르치고, 그리고 그 열매로 새로 나온 아이를 안아 주고 대화를 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주님께서는 잊혀졌던 감사와 감동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어른보다 덜 중요할까요. 주일학교를 섬기는 일은 결코 '작은 목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세우는 아주 '큰 목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학교 교사의 직분은 결코 목사직이나 장로직이 부럽지 않은 매우 '막중한 직분'입니다.
'제자의 길'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는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을 크게 지어 허세를 부리고, 교회를 사유화하여 욕심을 채우고, 돈으로 바꾼 박사 학위로 겉을 치장합니다. 이제는 세습도 노골적으로 당당하게 하고, 교회가 조금만 커지면 그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구제를 할 때도 조용히 못합니다. 사진을 찍고 광고하고 소란을 피워야 속이 풀립니다. 선교사를 파송할 때도 요란하게 선전하고, 장로나 권사 장립도 돈을 발라 가며 화려하게 치루고, 헌금한 것도 주보에 이름을 올려 공개하고, 심지어는 40일 금식 기도까지도 경력에 올리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교회 주변이 온통 돈, 명예 추구, 탐욕 그리고 외식으로 도배된 느낌이 듭니다.
이들의 분주함 속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낮아짐'과 '섬김'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오늘도 사회의 그늘진 구석에서는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이웃들이 영육으로 주리고 고통을 받고 있건만, 기복신앙으로 배를 불린 교회들은 온통 성공주의, 성장주의, 그리고 물질주의의 진창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요. 이런 것들이 제자들의 참된 모습일까요.
그러나 기성세대가 아무리 어두워도 너무 낙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주일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교육관에 교회와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보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들을 섬기는 일은 교회의 미래를 세우는 일이며, 동시에 새로운 감동과 만나는 일입니다.
우선 주일학교를 비롯한 중고등부, 대학 청년부 등 교회 교육 기관에서부터 새로운 각오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제자의 길'을 앞서 걸으신 위대한 선생님들의 뒤를 따르자는 것입니다. 이 길은 2,000년 전 가난한 어부들의 마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시작되어 골고다 언덕을 지나 소아시아와 로마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사랑의 길'이며 '섬김의 길'입니다.
어떤 장미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진한 향기를 발한다고 합니다. 더 이상 어두움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의 마음으로 이 어린 생명들을 함께 섬기자는 뜻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분명히 자신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또한 세상이 변화되는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6) |